[칼럼] 클로드가 울부짖었다: “도둑이야”
정원훈 텐에이아이CEO
세계 3대 SF 소설의 거장이자 미래학자인 아서 C. 클라크는 그의 에세이인 Profiles of the Future에 3대 법칙으로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되지 않는다."를 언급하였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충분히 긴장한 기업은 법무팀과 구별되지 않는다."
최근 Anthropic의 CEO 다리오 아모데이가 심상치 않은 보고서 한 장을 세상에 던졌다. 타깃은 딥시크(DeepSeek), 01.AI, 스텝펀(StepFun)—세 개의 중국 AI 기업. 죄목은 '클로드 증류(distillation)', 즉 클로드의 답변을 학습 데이터로 활용해 자사 모델을 키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 선생님한테 과외를 받아서 시험 잘 봤다"는 얘기다.
◆타이밍의 기술 혹은 실수
그런데 이 발표의 타이밍이 묘하게 아름답다. 딥시크 V4 출시 루머가 업계를 떠돌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딥시크는 이미 GPT-4와 클로드 3.5 소네트에 맞먹는 성능을 훨씬 낮은 비용으로 구현하며 실리콘밸리의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어온 전력이 있다.
경쟁자가 발표하기 직전에 '그들은 도둑입니다'라고 외치는 것. 이것이 전략적 선제타격인지, 아니면 패닉 버튼인지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설득력 없는 포커페이스라는 것.
◆이 드라마에 빠질 수 없는 인물
일론 머스크가 등장하지 않는 AI 뉴스는 허전하다. 커피 없는 아메리카노랄까. 그는 특유의 간결한 독설로 이 상황을 한 줄로 정리해 버렸다.
"잠깐, 당신들이 훔친 걸 누가 또 훔쳐갔다고 불평하는 건가요?"
이 말에 모두가 잠시 멈췄다. 왜냐하면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LLM의 원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GPT든 클로드든, 현존하는 대부분의 언어 모델은 인터넷 전체를 긁어 학습했다. 저작권이 있는 소설, 뉴스 기사, 학술 논문, 그리고 누군가의 깊은 밤 레딧 고민글까지. 해적이 다른 해적의 보물지도를 복사했다고 고소하는 격이랄까.
◆증류는 범죄인가, 관행인가
기술적으로 들어가 보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지식 증류(knowledge distillation)'는 AI 업계의 오래된 표준 기법이다. 더구나 딥시크는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다. MoE(Mixture-of-Experts) 아키텍처로 미국 빅테크들이 아직 완전히 따라잡지 못한 혁신을 선보였다. 복사보다는 진화에 가깝다.
결국 이번 사태는 AI 업계 전체가 얼마나 유리로 만든 집에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 폭로한 사건에 가깝다.
◆대한민국이 이 소동에서 건져야 할 것들
강 건너 불구경은 사치다. 우리도 그 강 위에 있다. 이 드라마를 그저 미중 AI 패권 다툼의 해프닝으로 소비하면 한국은 또 한 번 중요한 수업을 무료로 듣고 노트 필기를 안 한 셈이 된다. 이 사태가 한국에 던지는 통찰은 세 가지다.
첫째, '빠른 추격자' 전략의 유통기한이 끝나가고 있다.
딥시크의 진짜 위협은 단순히 "싸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방식을 배우면서 동시에 미국이 놓친 아키텍처를 혁신했다는 점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으로 반도체, 가전, 스마트폰 시장을 석권했다. 그러나 AI는 다르다. 추격하는 동안 목표물이 사라져 버리는 게임이다. 삼성이 HBM을 만들고, 네이버가 하이퍼클로바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아무도 아직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가는 용기'다. 문제는, 그 용기를 낼 생태계가 갖춰져 있느냐는 것이다.
둘째, 규제의 칼날이 혁신의 목을 겨누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중국이 딥시크를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가 있다. 엔비디아 H100을 구할 수 없으니 더 적은 자원으로 더 효율적인 모델을 만들어야 했고, 그 압박이 혁신을 낳았다. 한국의 AI 스타트업들은 어떤 압박을 받고 있는가. 칩 부족? 아니다. 과도한 데이터 규제, 불명확한 AI 법안, 그리고 '혹시 잘못되면 어쩌나'라는 관료적 두려움이다. 제약이 창의성을 낳기도 하지만, 잘못된 제약은 그냥 숨통을 조인다. 두 가지를 구별할 줄 아는 정책 감각이 지금 절실하다.
셋째, 언어 모델에서 '한국어'는 자산이자 해자(垓字: 구조적 경쟁우위)다.
딥시크도, 클로드도, GPT도 한국어를 잘한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적 맥락, 법률 체계, 비즈니스 관행, 그리고 한국인 특유의 눈치 문화를 진짜로 이해하는 모델은 아직 없다. 이것이 한국 AI 기업들의 마지막 해자다. 본래 중세시대의 해자(垓子, moat)는 적의 접근, 진격을 막기 위하여 성의 둘레 같은 곳에 땅을 파놓고 물을 채워 놓은 시설인데, 현대에는 구조적 경쟁우위를 가르키는 말로 쓰인다. 글로벌 거대 모델이 한국어 토큰을 더 많이 학습하는 순간, 이 해자도 메워진다. 특히 작년인 2025년 11월 18일에 구글이 발표한 내용 중 HWP(아래아한글) 문서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은 이제 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골든타임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틈새를 파고들어 수직계열화된 산업별 AI—법률, 의료, 제조, 금융—를 선점하지 않으면, 몇 년 후에는 외산 모델의 한국어 패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AI 패권 경쟁은 기술의 싸움이기 이전에 서사의 싸움이고, 타이밍의 싸움이며, 생태계의 싸움이다. Anthropic이 이번에 실수한 것이 있다면, 유리 집에서 돌을 던진 것이다. 한국이 실수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유리집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자기 집 기초공사를 미루는 것이다. 강 건너 불은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강 위에 있다.

정원훈 (텐에이아이 CEO)
경영학 박사로, 인공지능이 산업과 제도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현장에서 연구하고 실험해 온 AI 전략가다. AX 플랫폼을 표방하는 텐에이아이(Ten AI) CEO로서 대화형 인공지능 기반 서비스와 블록체인 ESG 프로젝트를 이끌었으며, 서울LAW봇·블록ESG 프로젝트 PM으로 실질적 적용 사례를 만들어왔다. 현재 한국인공지능진흥협회, 한국벤처창업학회, 한국지식재산교육연구학회 이사 겸 기술가치평가위원장을 맡고 있다.또한 KDI 2025/26 우즈베키스탄 KSP 사업 자문평가위원과 한국디지털자산포럼(KODIA) 정책기획실장으로서 정책과 현장을 잇는 역할을 수행 중이다. 현재 IT조선에서 「정원훈의 AI 트렌드」를 연재하며, 인공지능과 지식재산, 정책과 산업의 접점을 독자에게 쉽게 풀어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AI가 만든 콘텐츠, 누구의 것인가?』 등 총 9권이 있다.
출처 : 블록체인투데이(https://www.blockchaintoday.co.kr)